생명의 양식(2003. 10. 5.)

여호와를 앙망하라

사40:12-31

박우택 목사

요즘 우리 교회 믿음의 가족들이 다함께 하고 있는 QT교재인 「복 있는 사람」의 본문이 이사야서입니다. 이 본문을 함께 새벽기도회에서 다루면서 그 중에 한 본문을 다룸으로 이사야 전체에 대한 그림을 가지고 보는 것은 본문을 이해하는 일에 훨씬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림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합니다. 그 중에 렘브란트가 얼마나 중요한 화가인지, 단지 성화를 많이 그린 화가 정도로만 이해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암스텔담 국립박물관에 전시된 렘브람트 그림의 중요성과 그림을 보는 눈을 가이드가 자세히 설명해 주었기 때문에 세계 그림의 역사에 원근법과 빛의 예술세계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 때 저는 가이드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알게 되었습니다. 이사야서도 이러한 관점에서 전체적인 시각을 가지게 될 때 본문을 더욱 잘 이해하고 친숙해 지고 큰 은혜 가운데 들어가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할 때 참 막연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금방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의적인 질문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과연 나를 사랑하시는가?"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들으시는가?" "하나님은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고통을 아시는가?" "내가 지금 원수들로 인하여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아시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신앙에 회의를 가져오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구체적인 믿음의 표현들을 행하며 산다면 어느덧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우리가 믿는 믿음과 현실이 일치되는 것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믿음생활의 재미를 느끼게 되고 하나님의 의지하는 일에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1. 이사야서의 배경과 구분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누어져 있을 때 남쪽 유다의 선지자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유다의 웃시아 왕이 죽던 해(B.C. 740)에 선지자로서의 사역을 시작했으며, 그 후에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시대까지 그 사역을 계속하였습니다(사1:1). 하지만 여러 증거들을 볼 때 유다의 대표적인 악한 왕 므낫세의 치세까지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이사야 37:38에서 앗수르의 왕 산헤립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고, 또한 이사야의 승천(The Assumption of Isaiah)이라는 외경에 보면 므낫세가 통치하던 때에 이사야가 톱에 잘려 죽임을 당했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웃시아 왕이 죽던 해에 선지자로 활동하였지만 그는 웃시아의 치세에 대한 역사를 기록한 사람이었습니다. 역대하 26:22에 보면 "이 외에 웃시야의 시종 행적은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기록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선지자로 부름을 받기 전에는 왕실역사를 기록하는 역사가로서 활동하였다는 것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은 그의 책에 보면 당시의 역사를 하나님 중심적인 관점에서 잘 기술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가 언제 활동하였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던 시대적인 특징들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유다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격동의 시기인 기원전 8세기의 선지자였습니다. 성경의 자료들과 당시의 역사가 기록된 문서를 보면 기원전 8세기에 이스라엘은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 못지 않은 번영의 시대였습니다. 이 시대에 관리들의 생활상에 대하여 동시대 선지자였던 아모스 선지자가 기록한 아모스 6:4-6에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치 영화에 나오는 장면처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상아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켜며 양떼에서 어린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취하여 먹고, 비파에 맞추어 헛된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란을 인하여는 근심치 아니하는 자로다." 여기에 이들의 사치와 방탕한 생활이 몇 가지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당시에 상아상에 누워 잤습니다. '상아상'은 상아로 만든 침대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는 상아가 나오지 않고 외국에 수입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절은 수입된 상아로 된 침상에서 누워 자고 일어나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역시 먹는 식생활 문제에서 가장 연하고 좋은 고기를 먹었습니다. 또한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발랐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귀한 기름'은 아주 좋은 화장품을 사용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NIV성경은 "좋은 로션"(the finest lotion)이라고 번역한 것은 이것을 화장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록은 이사야가 선지자 활동을 하던 당시에 아주 잘 살았다는 것을 단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역사에서 가난한 자들은 착취를 당하고, 법과 질서는 무너졌고, 하나님의 말씀이 무시되는 시대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의 부귀와 영화는 가난한 자들을 착취한 결과였습니다. 바로 이 시대에 이사야 선지자는 앞으로 회개하지 않는 북쪽 이스라엘이나 유다는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전파하였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으려면 죄를 회개하고 언약의 말씀에 순종하면 희망이 있다는 메시지를 계속 전파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북쪽 이스라엘이나 남쪽 유다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씁니다. 그래서 북쪽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앗수르에, 남쪽 유다는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멸망하였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이사야를 썼습니다. 그것도 아름다운 시로 썼습니다. 이사야서는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부는 1-39장까지인데 주로 그들이 지은 죄로 인하여 남북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2부는 이사야 40-56:8까지인데, 여기서는 이사야 당시에는 아주 먼 미래에 일어날 일이었지만 죄가 용서함을 받고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게 될 상황을 염두에 두고,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게 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래서 2부를 회복의 메시지라고 부릅니다. 3부는 이사야 56:9-66:24인데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살고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예언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주로 주님의 재림에 초점을 맞추어 종말론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 구분은 본문을 해석하는 일에 아주 중요한 관점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사야 40장은 이 세 구분 가운데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예, 2부에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게 될 상황을 염두에 두고 쓴 글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40장은 회복의 메시지 가운데 전체적인 서론에 관한 부분으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2.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서 2부인 이사야 40:1-56:8의 전체적인 서론에 해당하는 이사야 40장에서 회복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40:1-2에서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이 말씀을 한 것은 이미 앞에 기록한 1-39장까지의 내용에서 죄에 대하여 심판을 받은 일에 대하여 이제 그 죄가 다 용서함을 입었다는 선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의 백성이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40:10-11에 보면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 그는 목자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며 어린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하나님께서 목자같이 그의 양떼들을 먹이시고 어린양을 품에 안으실 것이라는 그림언어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자세하게 소개함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사야 40:12-17을 보십시오. "누가 손바닥으로 바다 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재었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명칭으로 산들을, 간칭으로 작은 산들을 달아 보았으랴!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그가 누구로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공평의 도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주었느뇨.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 레바논 짐승들은 번제 소용에도 부족하겠고 그 삼림은 그 화목 소용에도 부족할 것이라. 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 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위대성을 시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니 전 인류 가운데 바닷물의 양을 측정하며, 하늘의 길이와 넓이와 길이를 측량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리고 인간의 과학이 발달하여 인간의 유전자 구조를 다 밝혀내는 획기적인 일을 하거나, 인공위성을 발사하여 화성을 탐사하기도 하지만 전 우주의 작은 일부분만을 알 뿐입니다.

이 말씀에서 묘사하고 있는대로 하나님 앞에서 열방은 통의 물 한방울과 같고, 저울에 달린 작은 티끌과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사40:15). 그리고 지구상에 아무리 크고 강한 나라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사야 40:17에서 시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대로 "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 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실제로 역사에 수많은 나라들이 있었지만 그 나라의 탁월한 군사력과 경제력이나, 지도력 때문이라고 말은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언제든지 그들을 없는 것같이 같이, 빈 것같이 만드시는 분이셨습니다. 당시 성경의 세계에서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등의 열강들의 부침이 하나님의 손에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당신자신을 소개하신 후에 우상과 비교하는 것이 타당하냐고 하면서, 우상숭배의 허구성을 지적하였습니다. 이사야 40:18-20을 보십시오.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에 비기겠느냐? 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위하여 은사슬을 만든 것이니라. 궁핍하여 이런 것을 드리지 못하는 자는 썩지 않는 나무를 택하고 공교한 장인을 구하여 우상을 만들어서 흔들리지 않도록 세우느니라." 온 천하만물들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며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우상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보면 이스라엘은 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주된 원인은 우상숭배 때문입니다. 열왕기하 17:7-8에 보면 "이 일은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사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신 그 하나님 여호와께 죄를 범하고 또 다른 신들을 경외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규례와 이스라엘 여러 왕의 세운 율례를 행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의 뜻은 우상은 사람들이 만든 존재일 뿐인데, 이러한 존재와 비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상숭배는 과거의 유물처럼 보입니다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간이 만든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드려야 할 영광을 다른 대상이나 이념의 우상으로 대치시킨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입니다. 훌륭한 구약학자인 알란 막그래 교수는 이 본문을 주석하고 적용하면서 "오늘날의 보편적인 우상의 형태는 인간 지성이나 과학에 대한 숭배"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인간의 지성이나 과학은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의 일하나일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이사야 40:21-24에서 계속하여 자신이 어떤 분이심을 다시 수사학적인 질문의 형태로 그의 능력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느냐?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의 거민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그가 하늘을 차일 같이 펴셨으며 거할 천막 같이 베푸셨고, 귀인들을 폐하시며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시나니 그들은 겨우 심기웠고 겨우 뿌리웠고 그 줄기가 겨우 땅에 뿌리를 박자 곧 하나님의 부심을 받고 말라 회리바람에 불려가는 초개 같도다." 하나님께서 이 수사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에 대하여 설명하였는데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을 책망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에 몇 가지 던지는 수사학적인 질문을 보십시오.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느냐?" 이 질문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의 위대한 힘과 그 세밀함을 보고도 하나님의 존재를 알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는 소위 세상의 권세자들이 지도자들이 불에 타는 지푸라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자신의 위대함을 설명하시고 난 뒤에 하나님과 같은 자가 없다고 선언하시며 "이러한 나의 존재를 과연 누구와 비교하겠느냐?"고 수사학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이 실패함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40:25-26을 보십시오. "거룩하신 자가 가라사대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나로 그와 동등이 되게 하겠느냐 하시느니라.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3. 하나님을 소개하는 실제적인 목적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사야 40장에서 길게 하나님 당신께서 어떤 분이신지 길고 자세하게, 그리고 논쟁적으로 소개하는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다수가 바벨론 포로에 끌려가서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인데 우리의 사정이 하나님은 아시는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서 참으로 고통스럽고 힘든데 과연 하나님은 알고 계시는가에 대한 신앙의 본질적인 회의가 생길 것을 예상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40:27에 보면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면서 비록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하여 이 수치를 당하고 있지만 과연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며,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계속하실 것인가? 우리가 이러한 어려움 가운데 있는데 과연 하나님은 알고 계시는가? 이러한 질문을 던지며 갈등하였습니다.

사실 우리도 하나님을 섬길 때 때로 고통을 당하고 힘이 들 때 하나님이 과연 나와 함께 하시는가? 이러한 회의적인 질문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특히 어렵고 힘을 들 때 과연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 나의 하나님이시라면 왜 이 상황에서 개입하시지 않는가 하는 문제들로 인하여 갈등하기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지 전에 이러한 상황을 예상하시고 희망적인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이사야 40:28-31을 보십시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여러분! 이 말씀이 의미하고 있는 바는 무엇일까요? 다시 수사학적인 질문으로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고 하면서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는 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말씀을 믿고, 그를 앙망하는 자에게는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지만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이 묘사는 그들의 원 고향이었던 가나안에서 지금 바벨론 포로로 끌려온 거리는 굉장히 멀리 떨어져 있는 상황이 될 것이지만 여호와를 바라보는 자들에게는 새 힘을 주셔서 독수리의 날개침같이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않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않게 하실 것을 말합니다. 실제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한다고 생각할 때 피곤하지 않습니다. 미래에 대한 분명한 희망이 있을 때 모든 일이 유쾌하고 즐겁고, 힘이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비록 죄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고 있지만 온 천하만물들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들에게는 모둔 것이 회복되어 꿈에도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가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이사야 선지자의 메시지를 읽었을 때 비록 그들이 지은 죄로 인하여 바벨론에서 고통당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죄를 사하시고 해방시켜 주시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게 될 희망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역사의 뒤쪽을 보면 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역사를 주장하셔서 페르시아의 고레스로 하여금 바벨론을 멸하시고 스룹바벨과 에스라의 인도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때의 걸음어 얼마나 가벼웠을까요? 이러한 이유에서 이사야 40장은 회복의 메시지인 이사야 40:1-56:8의 훌륭한 서론입니다.

그러면 우리와 이 이사야 선지자의 메시지와는 어떤 관련성이 있을까요? 우리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인 지은 우상숭배의 죄로 인하여 바벨론 포로에 끌려간 상황도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역사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주심으로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 주셨습니다. 이 역사에서 하나님 당신을 계시해 주신대로 여전히 온 세상의 만물을 창조하시고, 세상의 주관자들을 포함하여 통치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때로는 지은 죄로 인하여 고통가운데 있을 수도 있고, 또한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하여 여러 가지 갈등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그 분을 바라보고 변함없이 믿음생활을 한다면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시고, 붙들어 주셔서 죄에서 해방시키시고 가나안으로 돌아가게 하신 것처럼 오늘날에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