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양식(2006. 8.27)

큰 풍랑 중에 임하신 하나님

사도행전 27:6-26


길성남 목사

(고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항해 도중에 ‘유라굴로’라고 하는 광풍을 만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7장 전체에서 누가는 사도 바울이 어떻게 항해를 시작했는지, 어떻게 난파를 당했는지, 그리고 폭풍 속에서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를 매우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고대 시대에 기록된 난파에 관한 글 중에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오딧세이를 아시지요? 호메로스가 쓴 글인데, 이 글에도 난파에 관한 기록이 나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전해지는 고대의 글 중에서 오늘 본문처럼 상세하고 생생한 것은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항해를 어떻게 시작합니까? 사도행전 27장 1절과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는 가이사랴에서 배를 타고 항해를 시작합니다. 로마를 향해 떠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3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유대인들의 모함을 받고 고소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로마 총독 앞에서 여러 차례 재판을 받습니다. 그 사이에 2년이 흘러갑니다. 총독 한 사람이 떠나고 새로운 총독이 부임합니다. 그런데도 바울의 사건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실 바울은 죄를 지은 것이 없었습니다. 도적질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로마 제국에 해가 되는 일을 한 적도 없습니다. 당시 바울을 심문한 로마 총독들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로마법에 따라 공정하게 처리한다면 무죄 선고를 내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치가였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여론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에 바울을 미워하던 유대인들이 대단히 많았습니다. 심지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마시지도 않기로 굳게 맹세한 사람들이 사십 여명이나 되었습니다. 로마 총독이 바울을 무죄 방면한다면 그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많은 유대인들이 들고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총독은 판결을 미루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로마 황제에게 호소하는 편을 택합니다. 바울은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이었기 때문에 시민으로서 황제 앞에서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당시 로마 황제가 누구였습니까? 네로(54-68년)입니다. 네로 황제는 악명이 높지요. 로마 황제 가운데 최초로 기독교인들을 박해한 사람입니다. 또 자기 어머니가 국정에 간섭하는 것을 싫어해서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던 패륜아입니다. 한번은 어머니를 초청해서 바다 한 가운에서 성대한 잔치를 벌였습니다. 잔치를 하는 도중에 부하를 시켜서 배 밑바닥에 큰 구멍 세 개를 뚫게 했습니다. 그리고 잔치가 무르익고 어머니가 술에 취하자, 몰래 자리를 떴습니다. 네로는 자기 어머니가 죽은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어머니가 멀쩡하게 나타납니다. 네로는 어머니가 수영을 잘한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던 것입니다. 결국 네로는 자객을 보내 어머니를 살해하고 맙니다. 그러나 이렇게 악명 높은 네로도 초반에는 통치를 잘했다고 합니다. 기독교인들을 박해한 것도 64년에 일어난 로마 대화재 사건 이후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네로에게 상소를 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금 바울이 로마로 가는 것은 단지 네로 황제 앞에서 재판을 받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난 목적은 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궁극적인 목적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3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제사장들과 온 공회 앞에서 재판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23장 11절을 보십시오. 그날 밤 사도가 로마 군대의 영내에 갇혀있을 때 주님께서 그의 곁에 서서 말씀하십니다.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나님께서 로마에 가서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을 바울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입니다. 동시에 바울 자신이 가진 소망이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이 일이 있기 전에 이미 사도행전 19장 21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거기 (예루살렘)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울의 소망이었습니다. 


이것은 로마서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로마서는 바울이 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써 보낸 편지입니다. 로마서 1장 13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15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사도 바울은 로마에 가서 그곳에서도 복음을 전하고 싶어 했습니다. 로마뿐 아니라 서쪽으로 진출해서 서바나에 가고자 했습니다. 서바나는 지금의 스페인입니다. 그는 스페인에서도 복음전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마침내 바울은 꿈에 그리던 로마로 떠납니다. 로마 제국의 중심인 로마에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안고 출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항해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됩니다. 미항Fair Havens을 떠나 뵈닉스라는 곳으로 가다가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유라굴로는 북동쪽에서 불어오는 매우 강한 태풍이었습니다. 이 태풍 앞에서 배는 무력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27장 14-15절을 보십시오. 누가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얼마 못되어 섬 가운데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대작하니,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 가더라.” 바람이 부는 대로 그냥 밀려가는 것입니다. 다음 날에도 태풍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선원들은 큰 풍랑 때문에 심히 애를 쓰다가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립니다. 3일째 되는 날에는 배에서 쓰는 기구들까지 바다에 던져 버렸습니다. 사나운 풍랑 속에서 살아 보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무서운 폭풍 속에서 사람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속수무책입니다. 여러분, 20절을 보십시오.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짙고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습니다. 사나운 풍랑의 기세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습니다. 앞을 보아도, 뒤를 보아도, 옆을 보아도, 위를 보아도 살아나갈 구멍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배에 함께 타고 있던 누가조차도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영어성경에서는 이 구절을 아주 분명하게 번역합니다. “. . . we finally gave up all hope of being saved”(NIV). 모든 희망을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절망 상태에 빠졌습니다. 이제는 죽을 순간만 기다릴 뿐입니다. 여러분, 이런 상태에 빠진 적이 있습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본문에서 사도 바울 역시 큰 풍랑을 만났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 사명을 받고 로마로 가는 바울에게 이런 풍랑이 덮쳐왔습니까? 이 배에 탄 다른 사람들은 자기 좋을 대로, 자기 욕심대로 살아왔을 것입니다. 지금 이 배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밀을 싣고 로마로 가고 있었습니다. 선원들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자기 욕심대로 먹고 마시고 즐겼을 것입니다. 하나님도 인정하지 않고 제 욕심대로 살았으니 풍랑을 만나 난파를 당하는 것이 당연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쓰임 받는 바울에게는 왜 어려움이 닥칩니까?


여러분, 우리 믿는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하나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는 어려움이 닥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특별히 보호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풍랑을 만나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혹시 풍랑을 만나더라도 죽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우리는 인생의 풍랑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시련을 당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우리 믿는 사람들도 어려움을 겪습니다. 예수 잘 믿어도 역경이 찾아옵니다. 말씀대로 바르게 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고 애를 쓰는데도 인생의 역경이 닥쳐옵니다. 풍랑이 몰려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도 고통을 당합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도 눈물이 있고, 한숨이 있는 것입니다.


제가 몇 년 전에 합천에 있는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 교회에서 장로님 한 분을 만났는데, 아주 신실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외지에서 한 부부가 이사 와서 그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에서 아주 열심히 봉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1년쯤 지난 뒤에 농협에서 돈을 빌린다고 장로님께 보증을 서달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말렸습니다. 그러나 그 장로님은 설령 속는 일이 있더라도 같은 교회 성도를 믿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빚보증을 섰습니다. 그런데 그 부부가 빌린 돈을 갚지 않는 것입니다. 만기일이 지나도 갚지 못하고 연체료에다 이자 갚는 것도 힘들어했습니다. 그 부부의 처지가 딱했습니다. 그래서 장로님은 빌린 원금을 정리하라고 다시 자기 이름으로 대출을 받아서 그 부부에게 돈을 빌려주었습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그 부부가 야반도주를 하고 말았습니다. 빚보증을 서주고 돈을 빌려준 장로님은 원금에다가 이자까지 합해서 무려 1억원이 넘는 돈을 갚아야 했습니다.


여러분, 이 장로님은 그저 순수하게 다른 성도를 믿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 인생의 풍랑이었습니다. 물론 그분이 분별력이 없이 너무 쉽게 사람을 믿은 탓에 어려움을 당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말씀대로 살아도,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따라 살아도, 역경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바울이 무슨 잘못을 범했습니까? 그가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합니까? 지난 2년 동안 가이사랴의 옥에 갇혀서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지요. 이제는 미결수의 몸으로 로마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서 큰 풍랑을 만나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는 결코 초인은 아닙니다.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큰 태풍이 몰아치고 풍랑이 계속되었을 때, 두려웠을 것입니다.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고 부르짖었을지도 모릅니다. 


성도 여러분, 바울이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바울이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하나님은 무서운 태풍이 몰아치는 그 현장에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찾아오셨습니다. 22절 이하를 보십시오. 여전히 풍랑이 몰아치고 있는데 사도 바울은 배에 탄 사람들 앞에 섭니다. 모든 희망을 포기하고 죽을 순간만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풍랑이 그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고 있던 상황에서 바울은 어떻게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었습니까?


23절과 24절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힙니다.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풍랑을 잠잠케 하지 않으셨습니다. 여전히 풍랑이 거세게 몰아치는 중에, 캄캄한 절망의 어두움 속에서 당신의 사자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풍랑 속에서 고통당하는 것을 지켜보셨던 것입니다. 모든 소망이 끊어졌다고 생각하고 절망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 대한 시선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여전히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가장 적절한 때에 자기 백성을 위해서 일하십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바울을 찾아온 하나님의 사자가 무어라고 말씀했습니까? “내가 너를 구하리라”고 말씀했습니까?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했습니까? 아닙니다.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만 한다.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만 한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이 말은 바울이 풍랑 때문에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바울이 죽지 않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바울을 살려 주십니까? 사명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사명을 완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 있는 사람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죽지 않습니다. 유라굴로와 같은 광풍도 죽일 수 없습니다.


여러분, 저는 올해 우리 나이로 오십입니다. 50년을 살아오면서 나는 무엇을 했는가? 나는 앞으로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나?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사명은 무엇인가? 저는 스스로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진지하게 생각해봅니다. 저는 지금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바르게 가르치고 잘 훈련시켜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일꾼, 하나님의 교회에 꼭 필요한 일꾼이 되게 하는 것이 제가 받은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이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 가려고 하시다가도 이 사명 때문에 그대로 살려 두실만큼 나는 과연 이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하고 있는가, 이렇게 제 자신을 돌아보곤 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무슨 사명을 받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마다 사명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애기 낳고 사는 것이 우리 인생의 전부라면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여러분에게 주신 사명은 무엇입니까? 부모로서 자녀를 잘 양육하는 것도 사명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직장생활을 잘 하는 것도 사명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할 것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사명을 위해서 사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본문에서 또 한 가지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배에 탄 사람들을 모두 바울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24절 하반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이 바울 때문에 목숨을 건진다는 것입니다. 37절에 보면 이 배에 탄 사람이 모두 276명이라고 했습니다. 바울 때문에 275명이 목숨을 구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사명을 받은 바울이 함께 타고 있었기에, 바울로 인해 나머지 사람들이 구원받았던 것입니다. 그 배 안에서 바울은 초라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다른 죄수 몇 사람과 함께 바울은 미결수의 몸으로 로마까지 호송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바울은 죄수요, 소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하나님께서 그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보내신 생명 줄이었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의 이런 모습은 구약에 나오는 어떤 선지자와 극적인 대조를 이룹니다. 그 선지자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예, 요나입니다. 요나는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감당하지 않습니다. 그 사명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니느웨로 가라는 말씀을 거역합니다. 욥바라는 항구에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탑니다. 그러나 그가 탄 배는 큰 풍랑을 만납니다. 요나 때문에 그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고통을 당합니다. 거의 죽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풍랑 속에서 다른 사람들의 위로와 구원이 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5장 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의인 한 사람만 있으면 예루살렘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의인 열 명이 있으면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 배에 의인 한 사람, 바울 사도가 타고 있었기에 다른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고 의롭게, 신실하게 사는 사람들은 때로 초라하게 보입니다. 때로는 이 세상에서 미움을 받고 멸시를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사람들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생명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들에게 얼마나 덕을 보고 있는지 모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를 보십시오. 우리 사회가 도덕성이 높아서 이만큼 살고 있습니까? 정치인들이 정치를 잘해서 여기까지 왔습니까? 교육을 잘해서 여기까지 왔습니까? 요즈음 나라 전체가 사행성 성인 오락 게임으로 시끄럽습니다. 일차적으로 정부의 책임이 큽니다. 하지만 요행을 바라고 쉽게 돈을 벌어보려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문제가 이렇게 커진 것이 아닙니까? 사람들은 저마다 탐욕스럽게 남보다 더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남보다 더 많이 누리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최근에 한 언론인은 한국사회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국사회는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라 몰상식한 사회이며 물신(物神)에 찌든 괴물적 사회다. 그 위에 공격적 뻔뻔스러움이 번득이는 몰염치한 사회다.” 여러분, 한국사회를 너무 부정적으로 평가한 말인가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상당한 정도로 사실이기도 합니다. 한국사회가 이런 형편인데도 망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아직도 이 땅에 의인들이 존재하고 때문일 것입니다. 무릎 꿇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막고 있는 의인들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구약시대에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850명이나 되는 거짓 선지자들과 싸워 이긴 뒤에 이스라엘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을 보고 절망했습니다. 하나님께 이렇게 원망합니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왕상 19:10). 엘리야는 이스라엘에 자기 말고는 의인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가운데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천 명을 남겨 두셨습니다. 남은 의인이 있었던 것입니다(왕상 19:18). 성도 여러분, 지금 이 나라에는 교회가 타락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 주장의 상당 부분이 옳습니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신실한 성도들이 있습니다. 신실한 교회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이 나라가, 이 사회가 이만큼 유지되고 있다고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바울과 같이 이 세상에서 구원의 원천이 되고 있습니까? 여러분 때문에 주변의 사람들이 삽니까? 여러분 때문에 가정이 삽니까? 여러분 때문에 사업장과 직장이 삽니까? 여러분 때문에 교회가 삽니까? 여러분 때문에 이 나라, 이 사회가 삽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저 우리 한 몸 잘 되게 하려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 한 몸 천국 가게 하려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그저 자식이 잘되고 집안이 잘되게 하려고 우리를 부르신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때문에 이 교회가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때문에 이 사회가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때문에 이 나라가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사도행전 27장의 난파 사건은 어떻게 끝이 납니까? 44절을 보십시오. “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원을 얻으니라, 구원을 얻으니라” 할렐루야! 사도 바울이 미리 말한 대로, 그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얻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뿐 입니까? 사도행전 28장 14절에서 누가는 바울과 그의 일행이 마침내 로마에 도착했음을 알려줍니다. “로마로 가니라, 로마로 가니라.”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행전 27장에 기록된 이 이야기는 시편 107편을 연상시킵니다. 시편 107편을 기록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폭풍을 일으키기도 하시고 그것을 잠재우기도 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시편 107:30), 이렇게 노래합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도 “그리하여 로마로 가니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도행전은 많은 역경과 시련이 있었지만, 마침내 하나님의 복음이 로마 제국의 중심인 로마에까지 전해졌음을 증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명을 받아 일을 할 때도 어려움은 닥쳐옵니다. 인생의 풍랑이 몰아칩니다. 유라굴로와 같은 태풍이 밀려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그런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나운 폭풍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당신의 일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사도 바울로 하여금 목적지인 로마에 도착하게 하셨듯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완수하게 하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까? 어려움에 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가는 앞 길에 때로 유라굴로와 같은 태풍이 몰려올지 모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역경 가운데서 함께 하시고,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사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나는 하나님을 믿노라!”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이 신뢰한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과거에 그 하나님은 바울의 하나님이셨듯이, 또한 오늘 이 시대에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도가 신뢰했던 하나님, 그 신실한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시고 모든 역경을 극복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시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완수하시기 바랍니다.